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사회 변화 === 20세기까지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독립 후 갖게되는 공통적인 문제점은 다름아닌 구체제의 견제, 그중에서도 전근대적 지주들의 텃세이다. 역사의 고금을 막론하고 새로 출범한 정권은 민심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하려하지만, 지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사회 개혁에 제동을 걸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개발이 정체되어 그에 따른 사회 혼란이 가속화되다 소수의 권세가들만이 나라의 모든 부를 움켜쥐어 부익부 빈익빈이 극대화되는 끝에 내전까지 발발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최빈국 대부분이 이런 양상을 거쳐 혼란한 상황에 빠져있는 실정이다. 반면 한국은 6.25 전쟁과 그로인한 피난, 양대 진영간의 학살과 반목이 오랜 기간동안 뿌리내렸던 '''시골 공동체와 계급관계, 지주-소작인 관계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뜨린 결정타였다'''. 특히 '''양반-상민-천민의 계급의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내재되어 왔다가[* 일단 법적인 신분제는 식민지가 되기도 전에 [[갑오개혁]]을 통해서 폐지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률적인 의미에서였고, 실제 대중 사이에는 정서적으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몇 천년 동안 유지되었던 신분제가 법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공부만으로 신분 상승을 한다는 개념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남북한이 서구에 비해 양반 같지 않은 직업을 차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심하며 연예인 같은 직종도 간신히 딴따라 같은 누명에서 벗어났다. 남한에서는 고고학 교수가 현장 발굴하던 시절 공부안하면 저렇게 된다며 멸시하는 말을 듣고, 북한에서는 건설부대에 정치적 하류층만 복무하게 하며 심하게 부려먹는다. [[인도]]도 법적으로로는 [[카스트]] 및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 여러 사회적 차별을 헌법으로 금지하였지만 대중 사이에서는 정서적으로 여전히 계급 의식이 많이 남아있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6.25 전쟁을 통해 혈연적인 부분은 해체'''되었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신분적 주종관계와 경제적 종속관계는 3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으로 분해되었다. 비록 [[사농공상]]이 변질된 양반 같아 보이는 직업을 숭상하는 풍조는 지금도 남북한이 중화권은 몰라도 서구권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 비해 심하며 아예 차별을 당연시하는 모습도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처럼 지주들의 경제개발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지배 구조의 해체는 기존의 일제 치하에서 성장해 온 지주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는 효과까지 나면서 과거의 지주 세력이 한국 정치, 재계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국가체계가 완전히 리셋된 1953년 이후 재건한 사회체계와 정부조직의 힘으로 초토화된 서울경기권을 계획도시로 빨리 재건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 만든 사회 및 경제기반도 모두 파괴되어 한국은 비록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사람들 인식에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가 남긴 경제기반이 박살이 나서 보통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국가들이 이전 식민제국이 만든 기형적인 경제기반에만 의존하는 바람에 자체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 것에 비해, 한국은 일제가 남긴 기형적인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정상적이면서도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와 6.25를 통해 두번이나 국토 전체가 초토화된 트라우마와 아픈 기억으로 인해 전후 대한민국의 방향을 결정한 엘리트 집단, 심지어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위치인 노동운동, 학생운동, 사회적 약자 조직들조차도, '''"실패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 죽는다. 다시는 이 나라가 망하게 해선 안된다."'''라는 강력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했다. 그로 인해 한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극단의 효율성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좌파 지식인들조차 효율을 위해서는 권위주의 독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갖게 했고, 기득권조차 국민들과 자신을 분리하여 특권층처럼 군림하기 어려운 뭐라 형언하기 힘든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복합적인 정치환경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광복 직후 미 군정의 한국인들 상대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특유의 집단주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일단 갈등은 덮고 좌우, 상하 없이 대동단결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결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민족이 되었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70년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군사강국으로 거듭나게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나라는 가난했지만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와 경제적 종속 관계가 없어졌으므로 누구든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해서 출세하고 가족을 먹여살리면 된다는 정서가 한국 사회에 널리 깔렸고, 이것이 높은 교육열과 맞물려 전쟁 이후 고도 성장을 이끈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상대적으로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유리한 초기 조건을 형성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하였다는 점[* Dani Rodrik, Getting Interventions Right: How South Korea and Taiwan Grew Rich, December 1994]을 고려해보면, 이 전쟁이 비록 하향평준화를 불러왔지만,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난민]]들로 인하여 한반도 전체에 인구 대이동이 발생한 결과 각 지역의 문화가 섞이고 전후 사회 환경에 맞춘 새로운 문화가 태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식문화가 6.25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타 지역에 정착하여 만들어낸 여러 [[냉면]]의 [[변형]]이 좋은 예다. [[메밀]]을 구할 수 없는 부산에서 태어난 [[밀면]]을 비롯하여 해주냉면이 변화한 경기도 양평군의 옥천냉면, 서울식 냉면이 저렴한 식재료를 사용하여 변화한 칡냉면 등이 그러한 예다. 그 이외에도 북한~중부지방의 요리였던 [[만두]]의 전국적인 확산, [[주한미군]]을 통하여 나온 가공육류가 기존 한국요리와 결합한 [[부대찌개]], 강원도 속초 지역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만들어낸 [[오징어순대]] 등도 6.25 전쟁이 낳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